한국의 도시 서울특별시 역사 2편 (삼국시대 - 하)
한국의 도시 서울특별시 역사 2편 (삼국시대 - 하)
백제의 건국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견해를 열어둬야 하지만 일단 밝혀진 사실로만 보면 서울 정착만큼은 3세기 중반이 상한 임을 유념해야 하며, 또한 백제 건국 와 온조 남하, 서울 정도 시점은 모두 분리되어서 해석 가능하다는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할 것입니다.
한편 후대로 오면서 지금의 강남-강북과는 반대로, 그 주위 북서방으로 영역이 확장되자 백제의 도심지인 강남은 한산(漢山), 부도심인 강북은 북한산(北漢山)으로 나뉘어 불리게 되었습니다. 중간에 근초고왕이 한강을 건너 북한산으로 천도하기도 했지만 26년 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개발 살 내고 아신왕의 항복을 받을 때 아리수를 건넌 것으로 보아 얼마 가지 못하고 진사왕이 찬탈하고 찬탈당하는 와중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온 듯합니다. 즉 고구려의 침공을 대비하여 한강을 북쪽의 천연 방어선으로 선정했던 것. 실제로 이 작전은 주효하여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도 한강 이북까지만 진출할 수 있었고 강남으로의 진출은 저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신왕은 어떻게 해서든 모든 희생을 치러서 일단 전선을 개성 청목령까진 올려둔 상태였고, 한강 방어선은 2차 방어선으로 설정해 종심 방어를 실천했음을 잊어선 안 됩니다. 일단 흥미로운 건 아신왕-개로왕 때 고구려 VS 백제의 구도는 흡사 오늘날 남북한 대치 구도와 비슷한데, 여기서 증명되는 것은 경기 북동부-강원 북서부 일대인 한강 상류 산악 지역과, 개성 청목령 일대 방어선 이 모두가 날아간 상황에선 서울 방어가 대단히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개성 없이도 서울을 잘만 방어하고 있으나 적어도 휴전 조약 체결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이는 개성 방어선과 영서 일대 방어선이 모두 무너진 뒤 답이 없이 두 차례나 함락당한 한성백제의 사례에서 증명되는 것이며, 현대 대한민국 같은 경우 개성은 비록 없으나 한성백제와는 달리 적어도 영서 일대 방어선 상황에선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임을 참작해야겠습니다.
장수왕 때 한성백제가 망가졌던 건, 개로왕이 도림에게 속아 개성 일대 방어선 구축이나 확보에는 무관심한 채 엉뚱하게 한성 방어에만 열을 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문에 개로왕이 전사하고 위례성을 빼앗기자 문주왕이 급하게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5세기 이래로도 지금의 서울 지역은 강남의 한산군(漢山郡)과 강북의 북한산군(北漢山郡)으로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단, 지금의 강서구-양천구 일대는 제차파의(조선시대 양천군), 구로구 서부는 주부토(지금의 부평, 부천), 금천구-관악구-영등포구(+광명시) 일대는 잉벌노(조선시대 시흥), 서초구-동작구(+과천시, 안양시, 군포시) 일대는 동사 힐(지금의 과천) 소속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들이 서울에 편입되는 것은 후술 하겠지만 현대에 들어와서의 일입니다. 이러한 강남-강북 구도는 삼국시대가 끝나서도 강남의 한주(漢州)와 강북의 한양 군(漢陽郡)으로 정리되었습니다.
백제는 자국의 건국 지점이라는 점에서 강한 상징성이 있는 데다 중국으로 향하는 안정적인 항구였던 이곳의 수복을 지속적으로 노려왔으며, 결국 적어도 무령왕 때에 북진에 성공하여 오랜 숙원을 해결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왕 때 고구려와의 오곡원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한성 일대를 다시 고구려에게 내주어야만 했으며, 성왕은 나제 동맹을 맺고 있던 신라의 진흥왕과 함께 고구려의 양원왕 시기에 협공하여 일시적으로 영토 수복에 성공하여 하류는 자신이, 상류는 신라에게 분양하였습니다. 하지만 백제 귀족들이 왕권 강화를 방해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백제가 한강 유역을 포기하자 중국으로 향하는 안정적인 항구였던 이곳을 노리던 진흥왕은 결국 하류까지 손에 넣게 됩니다. 백제와 고구려 간의 육로도 자연스럽게 끊어버린 것은 덤. 결국 신라에 대해 불만을 품은 백제는 고구려와 적대관계를 청산해서 연합을 하고, 반대로 신라는 한강을 통해 중국과 교류하면서 당나라와 연합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