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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속 도시 역사 문화

중국의 도시 우한시 역사 1편

by 카카오블로거 2022. 8. 5.

중국의 도시 우한시 역사 1편

1911년 무창 봉기 기념관. 쑨원 동상 뒤의 건물은 당시의 임시 혁명정부 청사였습니다.

 

도시의 기원은 상나라 때 세워진 걸로 추정됩니다. 삼국지의 손견이 사망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한나라 대에는 강하군 소속이었으며, 형주 공방전으로 형주가 위와 오로 분리되자 오나라는 자국 영토의 강하군 일부에 무 창현을 두었고 손권과 손호가 천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해당 무 창현은 현재 우한 도심이 아닌 동남쪽 외곽인 어저우 일대입니다. 서진시대 이후 무 창현 부근 현 우한 일대는 무창 군으로 떨어져 나갑니다. 지금의 우한 시는 이렇게 해서 형성된 무창(우창) 현에 기원합니다. 두 무창이 한자가 같은 데다 연관성도 있기에 쉽게 헷갈립니다.

 

남송 시대에는 양양을 비롯한 남송의 요충지 중 하나였고, 약주라고 불렸습니다. 악비가 금나라로부터 중원 회복을 위해 군대를 주둔시켰던 곳이었고, 개경 원년(1259년) 가사도가 이곳에서 악주 전투를 지휘하였고, 중경에 있던 여문 덕의 군대도 이곳으로 향하여 악주를 방어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사도가 쿠빌라이와 화의를 제기하였던 것은 덤

 

한편 우창은 신해혁명의 진원지로 청나라 만주족 황조의 멸망에 결정타를 날린 곳이기도 합니다. 1911년 이 도시의 전신인 우창에서 일어난 우창 봉기가 그 시작이었습니다. 봉기의 이유는 청 황실이 철도 국유화를 감행하려 하자 보로 운동 즉 철로를 지키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만주족을 축출하고 한족을 부흥시키자는 멸만흥한으로 번진 것이었습니다. 이후 군벌 우페이푸가 장악하여 그의 중심지가 되었고 1921년부터 노동운동이 성행했으나 1923년 2.7 사건으로 큰 탄압을 받았습니다.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됨으로 1926년 10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상계 군벌 탕성즈가 양호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것에 불만을 품은 장제스가 우한 천도론을 주장하면서 11월 우한 천도가 결정되었지만 공산당, 국민당 좌파, 탕성즈가 연합하여 반장 운동을 벌이자 장제스가 기존 입장을 번복하여 난창 천도를 주장하면서 천도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후 3월에 정식으로 우한 국민정부가 출범하였으나 1927년 4월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난징 국민정부를 세운 후 난징 정부와 대립하다가 장제스 사퇴를 조건으로 영한 합작이 이뤄지면서 우한 정부가 난징 정부에 통합됩니다.

 

이때 탕성즈가 양호 지역을 점령하려 안휘성으로 쳐들어가서 깽판을 치다가 리쭝런, 바이충시에게 토벌당한 후 잠시 계계군벌의 영향력 하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국민정부에서는 광서파, 서산 회의파, 개조파 등이 알력을 벌이다가 결국 장제스가 복귀했고 장제스는 우한을 다시 우창, 한커우, 한양의 우한 3진으로 환원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커우가 국민정부의 12개 직할시 중 하나로 승격하는 등 우한 3진은 중국의 중요한 대도시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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