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수도 베이징, 북경 역사
역사
호모 에렉투스 베이징 원인의 흔적이 발견될 만큼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던 지역이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전국 7웅이었던 연나라의 도읍으로 이후로도 '연경(燕京)'이라 불렸습니다. 또한 계(薊)라고도 불렸습니다. 그래서 북경 대표 맥주의 이름이 옌징맥주(燕京啤酒)이기도 하고, 장비가 만날 삼국지연의 소설 속에서 외쳐대는 말이 "나는 연인(燕人) 익덕 장비다! 싸우고 싶은 놈은 튀어나와라!"입니다. 스스로를 연나라, 즉 연 지방 사람으로 지칭했다는 말. 참고로 삼국지연의에서 유비의 사형으로 유명한 공손찬의 근거지가 북평, 정확히는 우 북평이지만, 이 우 북평 군은 지금의 탕산시를 중심으로 한 행정구역으로 근세 베이징의 별명인 북평과는 가깝긴 해주셔도 별개의 지역입니다. 황제의 오르기 전 영락제의 작위 '연왕' 역시 고대의 연나라와 연관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중국 왕조들의 북방 요충지였으며, 전연, 후연, 북연 또한 베이징이 소속한 허베이성(河北省) 일대를 근거지로 하였습니다. 거란이 세운 요나라 때에는 석경당으로부터 연운 16주를 할양받고 당시 유주로 불리던 베이징을 남경 석진부로 삼았습니다. 요의 수도는 내몽골의 상경 임황부였으며 남경은 5대 수도의 하나로서 경제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수도로서의 역사는 중흥 대흥부(중도)라는 이름으로 불린 여진족 완안부 금나라 때부터인데 금나라를 시작으로 베이징은 일부 기간을 제외하고 거의 항상 수도의 자리를 유지했습니다.
강대국 고구려가 베이징과 텐진 지역을 함락시키고 정복했다는 것이 고고학적 조사로 밝혀졌습니다. 물론 고구려가 편찬한 100권이나 되는 역사서 '유기'와 '신집'이 현재 전해져오지 않아 실상은 모르지만 고구려가 지속적으로 중국에 출병한 것은 사실이니 고고학적 조사로 고구려의 영토가 훨씬 넓을 수 있습니다. 즉 고구려가 이 지역을 먹었다는 것. 신기한 것은 해당 시기의 이 지역 한족식 무덤이 전부 파 해쳐지거나 뼈에 살해 흔적이 있어서 이 지역의 "한족(漢族)들을 절멸시켰다"라고 보는 학자도 존재합니다. 삼국사기의 경우 일부분은 '신집'을 참고했지만 대부분이 중국 사서의 기록을 그대로 베껴왔습니다. 해당 지역은 선비족이 정복한 이후 고구려가 완전히 접수하여 북경을 다스렸고 지속적으로 북방민족 정복왕조가 등장하며 중요도가 올라갔고 금나라, 원나라는 아예 이곳을 도읍으로 정했습니다. 오고타이 칸이 금을 멸망시킨 후 이곳의 이름을 '중도'에서 위대한 도읍이라는 뜻의 '대도(大都)'로 개칭했으며 이후 중국 대륙 전체를 통일한 쿠빌라이 칸의 정복 국가의 국호를 중국인들이 원(元)으로 부르면서 대도를 수도로 삼고 피정복지를 다스렸습니다. 때문에 지금도 몽골어에서 유래한 지명들이 곳곳에 남아 있으며 후에 만주족 또한 베이징을 정복하여 역사적으로 자주 언급되는 중요한 도시로 난징과 같이 동아시아사 시험에 잘 나오는 지역입니다.
그리고 금나라와 서하를 멸망시키고 북중국에 들어선 키아트부 몽골족의 원나라 역시 이 근처에 수도를 정하고 '칸발리크' (대도(大都))라고 불렀는데, 이민족 왕조이지만 이로서 베이징은 처음으로 통일 왕조의 수도가 되고 대륙의 최중심지의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한족들의 반란, 특히 주원장의 명나라에 밀려 원은 점점 후퇴하고 도시의 이름은 북평부가 되어 연왕 부가 설치됩니다. 참고로 자금성 중 우리가 흔히 자금성으로 아는 명대 자금성이 아닌 원대 자금성은 현재 북해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으며, 티베트 불교 식 백탑이 떡하니 서 있어서 금방 알아볼 수 있습니다. 애석하게 한국에서 출발하는 패키지 상품에선 잘 안 갑니다.
최초로 이곳에 도읍한 한족 통일 왕조는 명나라인데, 그전까지는 이민족 왕조 여진족의 금나라와 몽골족의 원나라가 수도로 삼았습니다. 건문제를 몰아내고 황제가 된 영락제가 연왕 시절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에 명은 수도를 남경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자금성도 이때 조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자성의 난으로 명이 멸망한 이후에도 만주족 청나라가 도읍을 선양시에서 옮겨와 그대로 수도가 되었고,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난 뒤 중화민국 북양정부도 여기에 자리 잡았습니다.
처음에 위안스카이가 이곳에서 대총통에 취임했으며 이어 안휘 군벌의 수령 돤치루이의 지배를 받았고 1920년 아직 전쟁 이후 차오쿤, 우페이푸 등 직예군벌이 중앙정부와 베이징을 차지했습니다. 1924년 2차 직봉전쟁 중 펑위샹이 북경 정변을 일으킴에 따라 관내 진출을 단행한 봉천 군벌 장쭤린의 지배 하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1926년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이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하면서 북양정부와 국민정부 사이의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시작되자 북양정부는 베이징에서 철수했고 국민정부가 베이징을 점령했습니다. 이후 북방을 평정했다는 뜻으로 베이핑(北平)으로 다시 격하되었습니다. 북양정부는 황고 둔 사건으로 장쭤린이 암살당한 후 장쭤린의 뒤를 이은 장쉐량이 동북 역치를 통해 국민정부에 합류하기로 정함에 따라 소멸되었고 이때부터 중국의 수도는 난징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1946년 국공내전이 재개된 이후 화북 토비 총사령관 푸쭤이가 투항을 결정하면서 공산군에게 무혈 점령되었고, 최종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가 되어 베이징으로 이름이 돌아와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1989년 6월 4일 천안문 6.4 항쟁이 일어났던 천안문 광장이 이곳에 있고, 2008 베이징 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그 후 올림픽을 계기로 건설붐이 일어 도시가 대규모로 정비되고 있습니다. 이름답게 중국 기준에서는 북쪽, 특히 북동쪽에 있습니다. 이전 중국 왕조의 수도였던 뤄양이나 시안에 비하면 정말 눈에 띕니다. 이는 중국의 농경상 변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이 때문에 만주나 몽골계 왕조의 공격을 자주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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